
지난 6월 16일 토쿄 고탄다에서 베자르 발레 로잔느의 '발레 포 라이프'를 관람했다.
2004년(2003년?) 한국의 LG 아트센터에서도 공연되기도 했던 유명한 작품인데, Queen과 모짜르트의 음악을 사용한, 베자르의 수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있고 대중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98년 NHK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을 본 순간 부터 꼭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작품인데, 8년이 지나서야 보게 되었다.
널리 알려진 음악들과 지안니 베르사체의 의상, 20세기 발레단이 아닌 발레 베자르 로잔느의 오리지널 작품인 Ballet for Life는 모리스 베자르가 만 70세가 된 1997년에 초연되었는데, 역시 거장의 감각은 연령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준다.
초고난이도 테크닉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무용수들을 보면서 경탄보다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저 무대 위는 꿈의 공간인가. 내가 살아있는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한가?
실비 기엠의 경우는 너무나 신적이어서(그녀는 도무지 인간 같질 않다), 오히려 리얼한 감이 있었지만, 로잔느 발레단의 무용수들의 연기는 현실의 틈을 비집고 나온 꿈의 장면들 같았다.
어쩌면 Ballet for Life의 비디오 작품을 너무 오래, 자주 봐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기대했던 장면, I was born to love you에서는,
눈에 익은 미국인 발레리나가 아닌, 쿠바 출신 흑인 발레리나가 연기했다.
공연이 끝나고 주위 관객들이 흑인 발레리나가 최고였다고 웅성대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다.
미국인 발레리나(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가 두꺼운 근육의 파워넘치는 강렬한 연기를 했다면, 흑인 발레리나의 경우는 너무 부드럽고 유연했다.
미국인 발레리나의 파워는 너무나 우아해서, 우아함은 부드러움과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는 충격을 주었는데, 그렇게 힘차면서도 그토록 슬플 수 있다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그에 비해 흑인 발레리나, 카트린느 즈안나바르는 너무 완벽한 몸매에, 물흐르는듯한 연기여서 오히려 우아하지 못했고, 에로틱하기만 했다.
2층 S석에서 봐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허리를 너무 비틀어서(사람의 허리가 그런 각도로 비틀어 질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저속해보이기 까지 했다.
익숙한 우아함이 아닌 낯선 에로티시즘에 조금 당혹스러웠다는 것이 정확한 감상일 듯 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재미있는 작품이었고, 휴식없는 90분의 시간이 무척 짧게 느껴질 정도로 현란한 무대였다.
내 옆자리의 일본인 할머니는 Queen의 노래를 거의 전부, 들릴듯 말듯한 조용한 소리로 따라 불렀다. 하긴 베자르가 70세의 나이에 만든 작품이니 놀랄 것도 아니지만, 평범해 보이는 70대의 일본인 할머니가 Queen의 노래 가사를 거의 모두 암기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긴 했다.